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[[파일: 119609_55524_2735.jpg]] ▲ 관련 사진(진실화해위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) [[파일: 119609_55525_2753.jpg]] ▲ 관련 사진(진실화해위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) [[전주]] 점령 후 북한군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도내 우익 인사를 체포해 전주교화소에 수감했다. 전주교화소에는 기결수 500여 명과 미결수 400여 명을 포함해 우익인사까지 1,040여 명이 수감됐다. 그 후 한국군과 [[유엔군사령부|유엔군]]의 반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, 북한군은 9월 28일의 퇴각을 앞두고 24~25일, 이른바 보위부원들의 손으로 전주교화소에 수감돼 있던 300여 명의 수감자를 곡괭이와 몽둥이 등으로 처참히 학살하였다. 이때 희생된 인사 가운데 정진희, [[류준상(1910)|류준상]](제헌 국회의원), [[홍희종]](제헌 국회의원), 정우상(변호사), 조은(경찰), 유해진(제주도지사) 등이 있었다. 그 때 찾아가지 못했던 시신 115기는 교도소 앞 산에 합동 매장됐다가 1972년 교도소가 평화동으로 이전되기 전 [[효자동(완산구)|효자동]] 공원묘지로 이장됐다. 희생자는 총 344명으로 이 가운데 1950년 9월 25~28일 총 4일에 거쳐 사망한 피살자는 전주 사람이 169명, [[익산시|익산]] 39명, [[정읍시|정읍]] 32명, [[부안군|부안]] 28명, [[김제시|김제]] 21명이었다. [[http://news1.kr/articles/?2336614|관련 기사]] 당시 [[조선중앙통신사]]의 전주지사에서 보도과장의 신분으로 안락하게 근무한 [[이태]]의 저서([[남부군]])에 따르면 그 때의 [[추석]](1950년 9월 26일)은 그냥 평온했고, 다음 날부터 긴급보고(9월 20일에 미군이 [[군산]] 앞바다의 오식도에 상륙)의 뒤늦은 전달과 동시에 [[순창군]]으로 철수하라는 [[조선로동당]] 전북도당의 명령에 따라 시내 곳곳에서 매우 바빴다고 기억했다. 즉 대부분의 학살은 추석 이전에 조용하게 이뤄졌다고 추정할 수가 있다. 학살 한 뒤 암매장한 시신들을 발굴하는 영상이 있다.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YnSJKTDwXSM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